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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례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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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사[팔역가(八域歌) 52 페이지 / 전적]

송나라 역사

송사(訟事)[종매가 5 페이지 / 두루마리]

판결을 구하다.

송사(訟事)[경춘곡 5 페이지 / 전적]

소송(訴訟)

송사(訟事)[태상감응편이라(상감응편이라) 17 페이지 / 전적]

남과 분쟁(紛爭)이 있는 백성(百姓)이 옳고 그름을 판결(判決)해 주기를 관부(官府)에 호소(呼訴)하던 일.소송(訴訟)하는 일.

송사(訟事)[연행별곡(연별곡) 7 페이지 / 전적]

남과 분쟁(紛爭)이 있는 백성(百姓)이 옳고 그름을 판결(判決)해 주기를 관부(官府)에 호소(呼訴)하던 일.소송(訴訟)하는 일.

송사(訟事)[경춘곡 5 페이지 / 전적]

소송(訴訟)

송사초[석천집(石川集二-五)2-5 78 페이지 / 전적]

송사가 많이 있으면 풀는 밟은 사람이 많아서 풀이 잘 자라지 못하고 그렇지 않으면 잘 자라나서 무성하게 되는 관청에 심어 놓은 풀을 말한다

송상현(宋象賢)[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15 페이지 / 전적]

조선(朝鮮) 시대(時代) 14대 선조(宣祖) 때의 지사(志士)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 본은 여산(礪山) 선조(宣祖)9(1576)년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24(1591)년 동래부사로 내려가, 그 이듬해 임진년 4월 15일 남문(南門)에 올라가 독전하다가 순절했음. 19대 숙종(肅宗) 35(1760)년에 민 정중이 송 상현의 충절에 감복,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동래의 격전장 모습을 그린 동래부 순절도가 1972년에 송 장군(將軍) 후

송석松石[ 1 페이지 / ]

소나무와 돌. ‘붕송석朋松石’은 소나무나 돌을 벗삼아 숨어산다는 뜻임.

송성(誦聲)[이율곡선생권선가(李栗谷先生勸善歌) 5 페이지 / 전적]

공덕을 기리어 말하는 소리.

송성(頌聲)[경노의심곡 6 페이지 / 두루마리]

공덕을 기리어서 말하는 소리. 또는 태평한 세상을 노래하는 음악 소리.

송성(頌聲)[별교사(별교) 4 페이지 / 두루마리]

공덕을 기리어서 말하는 소리.

송세형(宋世珩)[석천집(石川集二-三)2-3 124 페이지 / 전적]

조선 중종,명종 때의 문신. 호는 반곡(盤谷). 대사헌,호조판서 등을 지냈다. 이황(李滉)과 함께 조광조(趙光祖)의 신원을 상소했다.

송송가가(松松家家)[자연천의설(自然天意說) 3 페이지 / 전적]

송송가가(松松家家)는 이재송송(利在松松)과 이재가가(利在家家)를 함께 이른 말이다.이재송송(利在松松)은 임진왜란 때, 적들이 소나무도 피해 다니고 송(松) 자가 든 마을도 피해 다녔다고 하여 임진왜란에 살 수 있는 비결을 이재송송(利在松松), 즉, 이로움이 소나무에 있다고 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재가가(利在家家)는 병자호란 중에 집안에 그대로 있어야 살수 있다는 것을 이르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송송가가(松松家家)[창덕가2 5 페이지 / 전적]

이재송송(利在松松)과 이재가가(利在家家).이재송송은 이로움이 소나무 숲에 있다는 말로 산으로 피하면 산다는 말.이재가가는 이로움이 집에 있다는 말로 도망가지 않고 집에 있는 것이 유리하다는 뜻.임진왜란과 홍경래의 난리 때 목숨을 지킬 수 있었던 방법을 말함.

송송가가(松松家家)[창덕가2 5 페이지 / 전적]

이재송송(利在松松)과 이재가가(利在家家).이재송송은 이로움이 소나무 숲에 있다는 말로 산으로 피하면 산다는 말.이재가가는 이로움이 집에 있다는 말로 도망가지 않고 집에 있는 것이 유리하다는 뜻.임진왜란과 홍경래의 난리 때 목숨을 지킬 수 있었던 방법을 말함.

송수(松樹)[하서선생집(河西先生集七)7 122 페이지 / 전적]

史記 孔子世家에 「孔子가 曹를 떠나 宋으로 가면서 弟子와 더불어 大樹의 아래서 習禮하니 宋司馬 桓魋는 孔子를 죽이고자하여 그 樹를 뽑아내므로 孔子는 떠났다」라 했음. 여기는 靈光倅 朴重會가 선생의 丘木을 베자 泮儒는 通文을 돌려 말하기를 「夫子習禮之樹 桓魋伐之 先生墓前之木 重會伐之」라는사실을 두고 쓴 것임

송순(宋純,1493-1583)[석천집(石川集二-三)2-3 105 페이지 / 전적]

조선 성종,선조 때의 문신 . 자는 수초(遂初), 호는 기촌(企村), 또는 면앙정(俛仰亭). 이조참판,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우참찬(右參贊)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뒤에 치사하고 담양(潭陽)의 제월봉(霽月峯)아래 석림정사(石林精舍)와 면앙정(俛仰亭)을 짓고 독서와 문학활동에 전념했다.

송시랑(宋侍郞)[백세보중(百世葆重 四)4 4 페이지 / 전적]

명나라 송응창. 경략으로 조선에 처음 왔다.

송시열(宋時烈)[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14 페이지 / 전적]

조선 숙종 때의 문신ㆍ학자(1607~1689). 아명은 성뢰(聖賚).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ㆍ우재(尤齋). 효종의 장례 때 대왕대비의 복상(服喪) 문제로 남인과 대립하고, 후에는 노론의 영수(領袖)로서 숙종 15년(1689)에 왕세자의 책봉에 반대하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저서에 ≪우암집≫, ≪송자대전(宋子大全)≫ 따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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