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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례풀이
엄자릉(嚴子陵)[석천집(石川集二-四)2-4 36 페이지 / 전적]
中國 東漢 때 사람인 嚴光의 字. 光武帝의 同學인 嚴光은 光武帝가 卽位하자 숨어 살면서 고기 잡고 밭 가는 것으로 일생을 보냈다고 함.
엄자릉(嚴子陵)[남여동락가 2 페이지 / 두루마리]
중국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은사(隱士)로, 이름은 엄광(嚴光)이며 자릉(子陵)은 그의 자임. 젊어서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제와 더불어 동문수학하였고, 광무제가 즉위한 다음에 은거하였다가 광무제의 초빙을 받아 조정에 나갔으나 곧 다시 돌아와 부춘산(富春山) 동강(桐江) 칠리탄(七里灘)에서 낚시를 즐기면서 살았음.
엄자릉(嚴子陵)[슈절자탄가 11 페이지 / 전적]
엄광. 서한말(西漢末) 여요(餘姚)인. 어릴 적 후한의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함께 뛰놀며 공부한 사이였다. 광무제가 왕망(王莽)의 신(新)나라를 제압하고 제위에 오르자 모습을 감췄다. 광무제가 그에게 간의대부(諫議大夫)의 벼슬을 내리자 엄광은 벼슬을 받지 않고 부춘산(富春山)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엄광이 은둔한 곳의 지명(地名)을 엄릉산(嚴陵山) 또는 엄릉뢰(嚴陵瀨)라 한다.
엄자릉(嚴子陵)[남여동락가 2 페이지 / 두루마리]
중국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은사(隱士)로, 이름은 엄광(嚴光)이며 자릉(子陵)은 그의 자임. 젊어서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제와 더불어 동문수학하였고, 광무제가 즉위한 다음에 은거하였다가 광무제의 초빙을 받아 조정에 나갔으나 곧 다시 돌아와 부춘산(富春山) 동강(桐江) 칠리탄(七里灘)에서 낚시를 즐기면서 살았음.
엄자릉(嚴子陵)[슈절자탄가 11 페이지 / 전적]
엄광. 서한말(西漢末) 여요(餘姚)인. 어릴 적 후한의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함께 뛰놀며 공부한 사이였다. 광무제가 왕망(王莽)의 신(新)나라를 제압하고 제위에 오르자 모습을 감췄다. 광무제가 그에게 간의대부(諫議大夫)의 벼슬을 내리자 엄광은 벼슬을 받지 않고 부춘산(富春山)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엄광이 은둔한 곳의 지명(地名)을 엄릉산(嚴陵山) 또는 엄릉뢰(嚴陵瀨)라 한다.
엄자릉(嚴子陵)[유회가 2 페이지 / 두루마리]
후한(後漢) 때의 사람 엄광(嚴光)을 말하며, 광무제(光武帝)가 간의대부(諫議大夫) 벼슬을 주었으나, 사양하고 부춘산의 동강에서 낚시질하고 나오지 않았다고 함.
엄자릉(嚴子陵)[청춘사연가 4 페이지 / 두루마리]
후한 광무제와 친구지간으로 관직을 제의했으나 이를 마다하고 숨어지낸 인물.
엄자릉(嚴子陵)[거창가라 16 페이지 / 전적]
엄광(嚴光).후한의 여요(餘姚) 사람.호는 자릉(子陵).어릴 때 광무제(光武帝)와 같이 공부했는데, 광무제가 즉위하자 이름을 바꾸고 숨어 사는 것을 광무제가 찾아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했다.후세 사람이 그의 낚시질하던 곳을 일러 엄릉뢰(嚴陵瀨)라 하였다.
엄자릉(嚴子陵)[아림가(娥林歌) 17 페이지 / 전적]
엄광(嚴光). 후한의 여요(餘姚) 사람. 호는 자릉(子陵). 어릴 때 광무제(光武帝)와 같이 공부했는데, 광무제가 즉위하자 이름을 바꾸고 숨어 사는 것을 광무제가 찾아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했다. 후세 사람이 그의 낚시질하던 곳을 일러 엄릉뢰(嚴陵瀨)라 하였다.
엄자릉(嚴子陵)[죽엽가(쥭엽가) 7 페이지 / 전적]
중국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 은사(隱士)로 이름은 광(光).어려서 같이 공부하던 광무제(光武帝)가 즉위하자 자릉은 성명을 바꾸고 숨어버렸다고 함.
엄자릉(嚴子陵)[조심가라 26 페이지 / 전적]
후한 광무제(光武帝) 때의 은사로 이름은 엄광(嚴光)이며 자릉(子陵)은 그의 자임. 젊어서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光武)와 더불어 동문수학하였고, 광무(光武)가 즉위한 다음에 은거하였다가 광무(光武)의 초빙을 받아 조정에 나갔으나 곧 다시 돌아와 부춘산(富春山) 동강(桐江) 칠리탄(七里灘)에서 낚시를 즐기면서 살았음.
엄자릉(嚴子陵)[조심가라 26 페이지 / 전적]
후한 광무제(光武帝) 때의 은사로 이름은 엄광(嚴光)이며 자릉(子陵)은 그의 자임. 젊어서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光武)와 더불어 동문수학하였고, 광무(光武)가 즉위한 다음에 은거하였다가 광무(光武)의 초빙을 받아 조정에 나갔으나 곧 다시 돌아와 부춘산(富春山) 동강(桐江) 칠리탄(七里灘)에서 낚시를 즐기면서 살았음.
엄자충이[은삭가 7 페이지 / 전적]
엄자릉(嚴子陵)임. 후한 광무제(光武帝) 때의 은사(隱士)로 이름은 엄광(嚴光)이며 자 는 자릉(子陵)임. 젊어서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와 더불어 동문수학하였고, 광무가 즉위한 다음 에 은거하였다가 광무의 초빙을 받아 조정에 나갔으나, 곧 다시 돌아와 부춘산(富春山) 동강 (桐江) 칠리탄(七里灘)에서 낚시를 즐기면서 살았음.
엄자충이[은삭가 7 페이지 / 전적]
엄자릉(嚴子陵)임. 후한 광무제(光武帝) 때의 은사(隱士)로 이름은 엄광(嚴光)이며 자 는 자릉(子陵)임. 젊어서 후한(後漢)을 세운 광무와 더불어 동문수학하였고, 광무가 즉위한 다음 에 은거하였다가 광무의 초빙을 받아 조정에 나갔으나, 곧 다시 돌아와 부춘산(富春山) 동강 (桐江) 칠리탄(七里灘)에서 낚시를 즐기면서 살았음.
엄전[회초가 3 페이지 / 두루마리]
태도나 행실이 정숙하고 점잖음.
엄전하고[벽천가 23 페이지 / 전적]
태도나 행실이 정숙하고 점잖고.
엄전하다[쳑사대희승부가(쳑사희승부가) 4 페이지 / 두루마리]
하는 짓이 정숙하고 점잖다.
엄절(嚴切)[한양가권지해라(한양가권지라) 42 페이지 / 전적]
성질이 매우 엄격함.
엄절(嚴切)[동국조선가 5 페이지 / 두루마리]
사람이나 그 언행이 위엄이 있고 매우 엄격함.
엄절(嚴切)[칠여가라 1 페이지 / 두루마리]
성질(性質)이 몹시 엄하여서 맺고 끊은 듯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