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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례풀이
이윤전설(伊尹傳說)[개명공산가(開明共産歌) 42 페이지 / 전적]
은(殷)나라의 현신(賢臣)이었던 이윤(伊尹)과 전설(傳說)을 함께 일컬은 말. 이윤은 탕왕을 도와 하(夏)나라의 걸왕을 멸망시켰고, 전설은 은나라를 증흥시켰음.
이율곡(李栗谷)[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69 페이지 / 전적]
이이의 성과 호를 함께 아울러 이르는 말.
이을호나[소동가 1 페이지 / 두루마리]
이를 말이나.
이음애(李陰崖)[한흥가라 58 페이지 / 전적]
조광조 등 신진 세력들과 어울리며 개혁을 추진했으나 이들의 정치 노선을 따르지 않고 사림파와 훈구파 사이의 중도 정치노선을 택했음. 상황에 따라 사림파와 훈구파의 완충 역할을 했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와 사림파의 무리로 지목되어 파직당했음. 퇴거 후에 학문과 독서로 여생을 마침.
이음애(李陰崖)[한흥가라 58 페이지 / 전적]
조광조 등 신진 세력들과 어울리며 개혁을 추진했으나 이들의 정치 노선을 따르지 않고 사림파와 훈구파 사이의 중도 정치노선을 택했음. 상황에 따라 사림파와 훈구파의 완충 역할을 했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와 사림파의 무리로 지목되어 파직당했음. 퇴거 후에 학문과 독서로 여생을 마침.
이음애(李陰崖)[한흥가라 58 페이지 / 전적]
조광조 등 신진 세력들과 어울리며 개혁을 추진했으나 이들의 정치 노선을 따르지 않고 사림파와 훈구파 사이의 중도 정치노선을 택했음. 상황에 따라 사림파와 훈구파의 완충 역할을 했으나,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와 사림파의 무리로 지목되어 파직당했음. 퇴거 후에 학문과 독서로 여생을 마침.
이음애(李陰崖)[한양가라 57 페이지 / 전적]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이자(李耔, 1480-1533)를 말하며, 기묘사화로 인해 파직되어 경기도 용인, 충북 음성 등에서 은거하며 지냈다.
이음양순사시(理陰陽順四時)[명륜가(明倫歌) 49 페이지 / 전적]
음양을 따르고 사시를 순종함.
이응(李膺)[석천집(石川集二-一)2-1 27 페이지 / 전적]
後漢의 名士
이의(異意)[추풍감별곡(秋風感別曲) 1 페이지 / 두루마리]
다른 뜻이 없음. 생각조차 하지 않음.
이의(異意)[추풍감곡(秋風感曲) 3 페이지 / 전적]
다른 뜻이 없음. 생각조차 하지 않음.
이의문(李義旼)[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56 페이지 / 전적]
이의민, 고려 명종 때의 무신(?~1196)이다. 천민 출신으로 1170년 정중부의 난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으며, 경대승이 죽은 후, 권력을 잡아 13년 동안 독재하다 최충헌에게 살해되었다.
이의방(李義方)[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56 페이지 / 전적]
고려 시대의 무신(?~1174)으로 1170년 정중부, 이고(李高) 등과 함께 보현원(普賢院)에서 문신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1171년 명종을 즉위시키고 딸이 태자빈이 되어 세력을 떨치다가, 정균(鄭筠)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하였다.
이이(而已)로다.[그리져리구경하고 21 페이지 / 전적]
뿐이로다.
이이(李珥,1536-1584)[석천집(石川集二-三)2-3 154 페이지 / 전적]
이조 중종,선조 때의 학자,문신.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16세에 사임당 신씨인 어머니를 여의고 19세에 금강산에 입산하여 불서(佛書)를 연구하다가 다시 유학에 전심하여 이황(李滉)과 쌍벽을 이루는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했고, 이황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대하여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했다. 동부승지,병조참지(兵曹參知),대사간,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십만양병(十萬養兵)을 주장하고 대동법(大同法)실시에 노력했다.
이이명(李頥命)[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41 페이지 / 전적]
조선 중기의 문신(1658~1722). 자는 양숙(養叔)ㆍ지인(智仁). 호는 소재(疏齋). 벼슬은 대사헌, 병조 판서 등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노론 4대신의 한 사람이며 당대의 석학으로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저서에 문집 ≪소재집≫이 있다.
이이첨(李爾瞻)[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27 페이지 / 전적]
조선 광해군 때의 문신(1560~1623). 자는 득여(得輿). 호는 관송(觀松)ㆍ쌍리(雙里). 선조의 후사(後嗣) 문제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이 대립하자 대북의 영수로서 광해군의 옹립을 주장하다가 유배되었으나, 광해군이 즉위하자 예조 판서에 올랐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실각되었다.
이인거(李仁居)[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31 페이지 / 전적]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지낸 이추(李樞)의 손자이다. 익찬(翊贊)을 지내고 강원도 횡성(橫城)에 거주하다가 1627년 정사공신(靖社功臣)들이 나라를 그르친다는 명분으로 수백의 도당을 규합하여 난을 일으켰다. 먼저 현감(縣監) 이탁남(李擢男)을 사로잡고 군기(軍器)를 빼앗아 스스로 창의중흥대장(倡義中興大將)이라 칭하고 서울로 침입하려다가 원주목사(原州牧使) 홍보(洪靌)에게 잡혀 서울에서 사형되었다.
이인복(李仁復)[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65 페이지 / 전적]
고려말의 문신(1308~ 1374)으로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극례(克禮), 호는 초은(樵隱)이다. 백이정(白頤正)에게 성리학을 배워 1326년(충숙왕 13) 문과에 급제하여 복주사록(福州司錄)이 된 후 춘추공봉(春秋供奉)에 발탁되었다. 평생 성리학을 존숭하여 불교를 멀리했고, 성품이 강직하여 옳지 못한 일을 보면 노기가 얼굴에 나타났으나 함부로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문장을 짓는 데 말이 엄하고 뜻이 깊어 기롱하고 풍자하는 것이 많았다고 한다.
이인친척(里人親戚)[궁월가라 13 페이지 / 전적]
이웃과 친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