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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례풀이
김일손(金馹孫)[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03 페이지 / 전적]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문인(1464~1498)으로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소미산인(少微山人)이다. 성종 17년(1486)에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 정랑을 지냈다. 춘추관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김자(金子)[석천집(石川集二-五)2-5 100 페이지 / 전적]
김강숙, 즉 김성원의 존칭이다.
김자수(金自粹)[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72 페이지 / 전적]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자는 순중(純中), 호는 상촌(桑村)이다. 대사성·좌상시·형조 판서를 지냈으며, 고려가 망하자 안동에 은거하다가 자결하였다.
김자점(金自點)[한양가권지해라(한양가권지라) 26 페이지 / 전적]
김자점(金自點, 1588~1651)
김장생(金長生)[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30 페이지 / 전적]
조선 중기의 학자ㆍ문신(1548~1631).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이이의 제자이자 송시열의 스승으로, 조선 예학(禮學)의 태두이다. 저서에 ≪의례문해≫, ≪근사록석의≫, ≪경서변의(經書辨疑)≫ 등이 있다.
김장자(金長者)[효열전니라(孝烈傳니라) 9 페이지 / 전적]
김씨 성을 가진 장자(長者). 장자란 지체가 높은 어른 또는 부자.
김재로(金在魯)[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42 페이지 / 전적]
조선 후기의 문신(1682~1759). 자는 중례(仲禮). 호는 청사(淸沙)ㆍ허주자(虛舟子). 숙종 36년(1710)에 문과에 급제하고 지평, 수찬을 거쳐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다. 노론(老論)의 선봉으로 활약하였으며, 청빈한 재상으로 이름이 높았다.
김저(金佇)[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70 페이지 / 전적]
고려 말기의 무장(?~1389)이다. 최영의 생질로 이성계를 죽이려고 모의하다가 발각되어 옥사하였다.
김전부(金典簿)[ 1 페이지 / ]
전부는 종친부(宗親府)의 관명으로 한훤당의 직손(直孫)인 김립(金立)을 가리킨다
김전부(金典簿)[고봉선생문집 권삼(高峰先生文集 券三) 164 페이지 / 전적]
전부는 종친부(宗親府)의 관명으로 한훤당의 직손(直孫)인 김립(金立)을 가리킨다
김정국(金正國 1485∼1541)[명륜가(明倫歌) 10 페이지 / 전적]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의성. 자는 국필(國弼), 호는 사재(思齋). 기묘사화로 삭탈관직되어 고양(高陽)에 내려가 팔여거사(八餘居士)라 칭하고, 학문을 닦으며 저술과 후진교육에 전심하였음.
김정희(金正喜)[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50 페이지 / 전적]
조선 후기의 문신ㆍ서화가(1786~1856). 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ㆍ추사(秋史)ㆍ시암(詩庵)ㆍ예당(禮堂)ㆍ노과(老果)ㆍ농장인(農丈人)ㆍ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순조 19년(1819)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 참판에 이르렀다. 학문 연구에 대해서는 실사구시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추사체를 완성하였다. 고증학, 금석학에도 밝아 북한산에 있던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였다. 작품에 <묵죽도(墨竹圖)>, <묵란도(墨蘭圖)>, <세한도(歲寒
김제(金堤)[호남가(湖南歌) 4 페이지 / 전적]
전라북도 서쪽 끝에 위치한 한 군으로 김제는 본래 백제의 벽골군이었는데, 신라 때 김제(金堤)로 바뀌었고, 1914년에는 금구(金溝)와 만경(萬頃)을 합쳤다.
김제(金堤)[호남가라 3 페이지 / 전적]
전라북도 중서부에 위치한 시.
김제남(金悌男)[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27 페이지 / 전적]
조선 중기의 문신(1562~1613). 자는 공언(恭彦). 선조의 장인으로 돈령부 영사를 제수받고 연흥 부원군으로 봉해졌다. 광해군 때에 영창 대군을 추대한다는 무고를 받고 사사(賜死)되었다.
김조순(金祖淳)[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46 페이지 / 전적]
조선 후기의 문신(1765~1832). 초명은 낙순(洛淳). 자는 사원(士源). 호는 풍고(楓皐). 순조의 장인으로서, 대제학을 지냈으며,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문장에 능하고 죽화(竹畫)를 잘 그렸다. 저서에 ≪풍고집≫이 있다.
김조순(金祖淳)[한양가권지해라(한양가권지라) 46 페이지 / 전적]
조선 후기의 문신(1765~1832). 순조의 장인으로 대제학을 지냈으며,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기반을 마련하였음.
김종서(金宗瑞)[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83 페이지 / 전적]
조선 전기의 충신(1390~1453)으로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이다. 태종 5년(1405)에 문과에 급제하고, 함길도 절제사를 거쳐 우의정을 지냈다. 육진(六鎭)을 개척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을 확정하였다.
김종연(金宗衍)[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70 페이지 / 전적]
고려 후기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고 제1차 쓰시마정벌을 단행한 무신으로 아버지가 신돈(辛旽)을 죽이려고 모의하다 발각되어 살해당하자, 피신하였다가 신돈이 죽은 뒤 나와서 원수가 되어 왜구와의 싸움에 참가하였다. 이후 이방춘(李芳春) 등과 이성계(李成桂)를 죽일 모의를 꾀하였으나, 공모자인 윤구택(尹龜澤)의 밀고로 모의가 사전에 발각되자, 붙잡혀 심문을 받다가 죽었다.
김좌근(金左根)[반만년한국가사(半萬年韓國歌史) 148 페이지 / 전적]
조선 후기의 문신(1797~1869). 자는 경은(景隱). 호는 하옥(荷屋). 헌종 4년(1838)에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김조순의 아들로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중심인물이었으나 대원군의 집정으로 실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