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군청 : (57339)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읍 추성로 1371 / 대표전화 : 061-380-3114
한국가사문학관: (57392) 전라남도 담양군 가사문학면 가사문학로 877 / 대표전화 : 061-380-2700 팩스 : 061-380-3556
Copyright by Damyang-Gun. All Right Reserved.
홈 > 한국가사문학DB > 가사
용례풀이
곽 광(霍光)[하서선생집(河西先生集一)1 88 페이지 / 전적]
「霍光」- 漢 平陽人이요 字는 子孟임 昭帝가 卽位할 때 나이가겨우 八歲였으므로 霍光은 大司馬 大將軍으로서 武帝의 遺詔를 받들어 幼主를 보필하였음.
곽거(郭巨)[효행록이라(효록이라) 6 페이지 / 전적]
중국 후한(後漢) 때의 사람으로 효행으로 이름났다.
곽거(郭巨)[삼강오륜자경곡(三綱五倫自警曲) 15 페이지 / 전적]
중국 후한 때에 효성이 지극했던 24효 중의 한 사람. 원전의 ‘곽광(郭匡)’은 곽거(郭巨)의 오식임.
곽거(郭巨)[자경별곡 8 페이지 / 전적]
중국 후한 때에 효성이 지극했던 24효 중의 한 사람. 가사의 원문에서 “師巨”라 한 표기는 ‘郭巨’의 오기임
곽거(郭巨)[ 1 페이지 / ]
중국 후한 때에 효성이 지극했던 24효 중의 한 사람.
곽거(郭巨)[장연변씨세적(長淵邉氏世蹟) 84 페이지 / 전적]
중국 후한 때에 효성이 지극했던 24효 중의 한 사람.
곽거(郭巨)[오륜가라 10 페이지 / 전적]
중국 후한(後漢) 때의 사람. 집이 가난하여 노모(老母)가 굶주리는 것을 보고, 이를 면하게 하기 위하여 자식을 묻고자 땅을 파다가 황금 솥을 얻었다고 한다.
곽거(郭巨)의 위모매아(爲母埋兒) 고사[효성가라 3 페이지 / 전적]
곽거는 한(漢) 나라 사람으로 집이 몹시 가난했음에도 모친을 극진히 공양했는데, 그의 모친이 어린 손자를 사랑하여 부족한 음식을 나누어 먹이자 모친의 건강이 염려된 곽거와 그 부인이 아들을 땅에 파묻기로 하고 땅을 파자 그곳에서 황금이 나왔다고 함.
곽광(霍光)[초씨션원쳥음가 7 페이지 / 전적]
전한(前漢)의 정치가. 무제 사후 소제를 보필, 정사를 집행함. 소제의 형인 연왕 단의 반란을 기회로 상관걸 등 정적을 타도, 실권을 장악함. 소제 사후 창읍왕의 제위를 박탈하고, 선제를 즉위하게 함.
곽광(霍光)[녁대가(녁가) 45 페이지 / 전적]
한나라의 명신(名臣). 금일제(金日磾)와 함께 무제(武帝)의 유지를 받들어 소제(昭帝)를 보필하였음. 이 시기에 백성들의 생활은 넉넉하고 사방의 오랑캐들이 모두 복속하였다고 함.
곽망우당(忘憂堂)[한흥가라 64 페이지 / 전적]
곽재우(郭再祐). 조선 중기의 의병장(1552~1617).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임진왜란 때 의령(宜寧)에서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 다시 의병장으로 출전하였다. 그 뒤 진주 목사, 함경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곽망우당(忘憂堂)[한흥가라 64 페이지 / 전적]
곽재우(郭再祐). 조선 중기의 의병장(1552~1617).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임진왜란 때 의령(宜寧)에서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 다시 의병장으로 출전하였다. 그 뒤 진주 목사, 함경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곽망우당(忘憂堂)[한흥가라 64 페이지 / 전적]
곽재우(郭再祐). 조선 중기의 의병장(1552~1617).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임진왜란 때 의령(宜寧)에서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 다시 의병장으로 출전하였다. 그 뒤 진주 목사, 함경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곽망우당(郭忘憂堂)[한양가라 63 페이지 / 전적]
조선 전기의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1552-1617). 임진왜란 때 의령(宜寧)에서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 다시 의병장으로 출전하였다.
곽분양[칠녀가 12 페이지 / 두루마리]
곽자의(郭子儀, 697~781). 중국 당(唐)나라 현종, 숙종(肅宗) 때의 정치가. 시호(諡號)는 충무(忠武).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로 있을 때 안사(安史)의 난(亂)을 평정하고 대국공(代國公)에 봉해졌다가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짐. 성격이 관후(寬厚)하고 말년(末年)을 화원(花園)에서 즐긴 다복(多福)한 사람. 부귀공명(富貴功名)을 구비한 팔자 좋은 사람.
곽분양[고분가 16 페이지 / 전적]
곽분양은 중국 당나라 때의 무장으로 본명은 곽자의(郭子儀, 697~781)다.당 현종 때 안록산의 난을 토벌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워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지고, 살아생전 온갖 부귀와 공명을 누렸다 전해진다.어떤 사람을 일컬어 ‘곽분양 팔자다’라 하면 그가 곽분양처럼 좋은 팔자를 타고난 사람이란 뜻으로 통한다.
곽분양[고분가 16 페이지 / 전적]
곽분양은 중국 당나라 때의 무장으로 본명은 곽자의(郭子儀, 697~781)다.당 현종 때 안록산의 난을 토벌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워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지고, 살아생전 온갖 부귀와 공명을 누렸다 전해진다.어떤 사람을 일컬어 ‘곽분양 팔자다’라 하면 그가 곽분양처럼 좋은 팔자를 타고난 사람이란 뜻으로 통한다.
곽분양(郭汾陽)[해동졍상국회방연(동졍상국회방연) 5 페이지 / 전적]
분양왕 곽자의(郭子儀, 697~781)를 말함. 중국 당나라의 무장으로 안녹산의 난을 토벌하여 도읍인 장안(長安)을 탈환하였고, 뒤에 토번(吐蕃)을 쳐서 큰 공을 세워 사도(司徒), 중서령(中書令)에 이어 분양왕(汾陽王)으로 봉해졌음. 부귀와 공명을 다 이룬 좋은 팔자를 가졌다 하여 ‘곽분양팔자’라는 말이 생겼음.
곽분양(郭汾陽)[헌수가라 9 페이지 / 두루마리]
당나라 때의 명장(名將)인 곽자의(郭子儀). 하남성(河南省) 정현(鄭縣) 사람으로, 현종 때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가 되어 안록산의 난을 토벌하여 하북의 10여 군을 회복하였고, 숙종·대종 때에 토번(吐蕃)을 쳐서 많은 공을 세우고 사도(司徒)·중서령(中書令)에 이어 분양왕(汾陽王)으로 봉해졌음. 그래서 그를 곽분양(郭汾陽)이라고 부름. 부귀공명과 다복을 누렸다고 하며, 이것 때문에 팔자 좋은 사람을 ‘곽분양 팔자’라고 함.
곽분양(郭汾陽)[헌수가라 9 페이지 / 두루마리]
당나라 때의 명장(名將)인 곽자의(郭子儀). 하남성(河南省) 정현(鄭縣) 사람으로, 현종 때 삭방절도사(朔方節度使)가 되어 안록산의 난을 토벌하여 하북의 10여 군을 회복하였고, 숙종·대종 때에 토번(吐蕃)을 쳐서 많은 공을 세우고 사도(司徒)·중서령(中書令)에 이어 분양왕(汾陽王)으로 봉해졌음. 그래서 그를 곽분양(郭汾陽)이라고 부름. 부귀공명과 다복을 누렸다고 하며, 이것 때문에 팔자 좋은 사람을 ‘곽분양 팔자’라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