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여(相如)107의 옛 곡조는 의연(依然)히 있다마는
탁문군(卓文君)108의 맑은 지음(知音)109 호호이110 자취 없네.
상사곡(相思曲) 세 글자는 날을 위해 지었는가.
결연한 이 이별이 느낄 일도 하도 많다.
<전생(前生) 차생(此生) 무슨 죄로 우리 둘이 생겨 나서
인간 백년 얼마기로 각재동서(各在東西) 그리는고?
황천(皇天) 후토(后土) 이 뜻 알아 이별 없기 원(願)이로다.
진시황(秦始皇) 분시서(焚詩書)할 때 어느 틈에 숨었다가
지금까지 누전하여 나의 일신 병이 되고
수양 매월(每月) 흠뻑 갈아 황모필(黃毛筆) 덤뻑 찍어
월매초죽(月梅草竹) 그려 낼 때 그리기는 옳건마는
명월(明月) 사창(紗窓) 앞에 앉아 나는 무엇 그리는고?
상사(想思) 두 글자는 나를 위해 그렸도다. >111
창해월(滄海月)112 영두운(嶺頭雲)113은 임 계신 듯 비치건만
심중(心中) 소회(所懷) 안전수114는 나 혼자뿐이로다.
갈수록 심난한데 해는 어이 수이 갈까.
잘 새는 깃을 찾아 무리무리 풀고들고
야색은 창망하여 먼 데 나무가 희미하다.
적막한 빈방 안에 울적이 홀로 안자
지난일 다 풀치고115 오는 시름 생각하니
산 밖에 산이 있고, 물 밖에 대해(大海)로다.
<추풍감별곡(秋風感別曲)>은 작자와 연대는 알 수 없는 조선시대 고소설 <채봉감별곡(彩鳳感別曲)>에 삽입된 가사(歌辭)이다. 고소설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평양성(平壤城) 김진사의 딸 채봉(彩鳳)은 후원으로 봄나들이를 나온다. 그 모습에 반한 전 선천부사(宣川府使)의 아들 장필성(張弼成)은 그녀가 떨어뜨린 손수건에 사랑하는 시를 써서 보내고 채봉도 화답시를 보내면서 마침내 둘은 약혼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벼슬에 눈이 어두운 채봉의 아버지 김 진사는 딸을 허 판서의 첩으로 보내려고 마음을 먹는다. 채봉은 평양으로 도망을 나온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허 판사가 김 진사를 하옥시키자 채봉은 아버지를 구하고자 송이(松伊)라는 기생이 된다. 서로 주고받은 시를 확인한 채봉과 필성은 다시 만나게 되지만 평양감사 이보국(李輔國)이 채봉을 탐내어 데려가자 둘은 다시 이별을 한다. 필성은 자진하여 감사의 이방으로 변신한다. 채봉은 밤마다 필성을 그리며 <추풍감별곡>을 읊는데 이 사연을 듣게 된 감사는 채봉을 놓아 결국 둘은 결혼을 하게 된다.
이 작품은 남녀 주인공의 신분을 뛰어 넘는 파란 많은 사랑의 과정을 통해 당시 불합리한 사회 질서와 부패상을 보여주고 있다. 또, 정확한 표현법과 독창적인 구성으로 인해 고소설의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삽입된 채봉의 노래 <추풍감별곡>은 일명 <감별곡(感別曲)>이라 하여 서도소리로 개작하여 불렸다. 조선 말기에 유행했던 이 가사는 순결하고 진질한 사랑을 주제로 한 절창으로 평가 받아 규방에서 아녀자들 사이에 대단히 유행했다. 따라서 필사본이 많은데, 필사하는 과정에서 필사자의 의도와 심사에 따라 원전과 다르게 필사된 부분도 있고 오류도 종종 발견된다.
이 필사본은 필사자나 소유자를 알 수 없고, 보관 과정에서 제목과 앞부분이 찢겨 나갔다. 18.5×385㎝의 두루마리 한자에다 1행에 4음보 2구를 종서(縱書)하여 모두 280행으로 기록하고 콩기름을 먹였다. 중간에 빠진 부분도 있고, 원전과는 다르게 표기된 부분도 있다. 원전에는 없는 결사(結辭)를 첨가하는 것으로 보아 가사(歌辭) 문학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어휘 풀이
107)상여(相如) : 사마상여(司馬相如). 중국 전한(前漢)의 문인(B.C.179~B.C.117).
108)탁문군(卓文君) : 탁문군(卓文君). 중국 서한(西漢) 대 촉(蜀)의 부호(富豪) 탁왕손(卓王孫)의 딸로 사마상여(司馬相如)와의 사랑 이야기가 유명함. 가도사벽(家徒四壁).
109)지음(知音) : 음(音)을 앎. 마음을 잘 알아주는 친한 벗을 이르는 말. 백아(伯牙)가 타는 거문고 소리를 듣고 악상(樂想)을 일일이 알아맞혔다는 종자기(鍾子期)와의 옛 고사에서 유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