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 바람소리 금성(金聲)1이 완연하다.
고침단금(孤枕單衾)2에 상사몽(相思夢)3 훌쳐4 깨어
죽창(竹窓)을 반개(半開)하고 막막하게 앉았으니
만리 장공(長空)에 하운(夏雲)이 흩어지고>5
천 년 강산에 찬 기운이 새로워라.
심사(心思)도 창연(愴然)6한대 물색(物色)도 유감(有感)7하다.
정수(庭樹)8에 부는 바람 이한(離恨)9을 아뢰는 듯,
추국(秋菊)에 맺힌 이슬 별루(別淚)10를 머금은 듯,
잔유남교(殘柳南郊)11에 춘앵(春鶯)12이 이귀(已歸)13하고,
소월동정(素月洞庭)14에 추원(秋猿)15이 슬피 운다.
임 여의고 썩은 간장(肝腸) 하마터면 끊어지리.
삼춘(三春)에 즐기던 일 예16런가 꿈이런가?
세우(細雨) 사창(紗窓)17 요적(寥寂)18한대 흡흡(洽洽)히19 깊은 정(情)과
야월삼경(夜月三更) 사어시(私語時)20에 백년 살자 굳은 언약(言約).
단봉(丹峰)21이 높고 높아, 패수(浿水)22가 깊고 깊어
문어지기 이의(異意)23거든 끊어질 줄 짐작하랴.
<추풍감별곡(秋風感別曲)>은 작자와 연대는 알 수 없는 조선시대 고소설 <채봉감별곡(彩鳳感別曲)>에 삽입된 가사(歌辭)이다. 고소설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평양성(平壤城) 김진사의 딸 채봉(彩鳳)은 후원으로 봄나들이를 나온다. 그 모습에 반한 전 선천부사(宣川府使)의 아들 장필성(張弼成)은 그녀가 떨어뜨린 손수건에 사랑하는 시를 써서 보내고 채봉도 화답시를 보내면서 마침내 둘은 약혼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벼슬에 눈이 어두운 채봉의 아버지 김 진사는 딸을 허 판서의 첩으로 보내려고 마음을 먹는다. 채봉은 평양으로 도망을 나온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허 판사가 김 진사를 하옥시키자 채봉은 아버지를 구하고자 송이(松伊)라는 기생이 된다. 서로 주고받은 시를 확인한 채봉과 필성은 다시 만나게 되지만 평양감사 이보국(李輔國)이 채봉을 탐내어 데려가자 둘은 다시 이별을 한다. 필성은 자진하여 감사의 이방으로 변신한다. 채봉은 밤마다 필성을 그리며 <추풍감별곡>을 읊는데 이 사연을 듣게 된 감사는 채봉을 놓아 결국 둘은 결혼을 하게 된다.
이 작품은 남녀 주인공의 신분을 뛰어 넘는 파란 많은 사랑의 과정을 통해 당시 불합리한 사회 질서와 부패상을 보여주고 있다. 또, 정확한 표현법과 독창적인 구성으로 인해 고소설의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삽입된 채봉의 노래 <추풍감별곡>은 일명 <감별곡(感別曲)>이라 하여 서도소리로 개작하여 불렸다. 조선 말기에 유행했던 이 가사는 순결하고 진질한 사랑을 주제로 한 절창으로 평가 받아 규방에서 아녀자들 사이에 대단히 유행했다. 따라서 필사본이 많은데, 필사하는 과정에서 필사자의 의도와 심사에 따라 원전과 다르게 필사된 부분도 있고 오류도 종종 발견된다.
이 필사본은 필사자나 소유자를 알 수 없고, 보관 과정에서 제목과 앞부분이 찢겨 나갔다. 18.5×385㎝의 두루마리 한자에다 1행에 4음보 2구를 종서(縱書)하여 모두 280행으로 기록하고 콩기름을 먹였다. 중간에 빠진 부분도 있고, 원전과는 다르게 표기된 부분도 있다. 원전에는 없는 결사(結辭)를 첨가하는 것으로 보아 가사(歌辭) 문학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어휘 풀이
1)금성(金聲) : 쇠에서 나는 소리.
2)고침단금(孤枕單衾) : 외로운 베개와 홑이불. 젊은 여자가 홀로 쓸쓸히 자는 잠자리를 이르는 말.
3)상사몽(相思夢) : 임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꿈.
4)훌쳐 : 쏠리다.
5)<> : 원문에 빠진 부분은 이후 김기동 · 전규태 편,
6)심사(心思)도 창연(愴然) : 몹시 서운하고 섭섭하다.
7)물색(物色)도 유감(有感) : 느끼는 바가 있음.
8)정수(庭樹) : 마당에 있는 나무.
9)이한(離恨) : 이별의 한.
10)별루(別淚) : 이별할 때 흘리는 눈물.
11)잔유남교(殘柳南郊) : 잎이 진 버드나무가 있는 남쪽 교외.
12)춘앵(春鶯) : 앵무새.
13)이귀(已歸) : 이미 돌아가고.
14)소월동정(素月洞庭) : 하얗게 달이 비친 동산.
15)추원(秋猿) : 원숭이. 잔나비.
16)삼춘(三春)에 즐기던 일 예 : 옛날 일.
17)사창(紗窓 : 비단으로 바른 창. 연인이 사용하는 방의 창.
18)요적(寥寂) : 고요하고 적적하다.
19)흡흡(洽洽)히 : 합함.
20)사어시(私語時) : 달이 밝은 한 밤중에 사사로이 말을 건널 때. 이백의 <장한가(長恨歌)> 중 ‘夜半無人私語時’를 에서 유래했다.
21)단봉(丹峰) : 모란봉.
22)패수(浿水) : 대동강의 옛 이름.
23)이의(異意) : 다른 뜻이 없음. 생각조차 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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