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성주(星州) 가야산(伽倻山)1은 산수(山水) 가운데 조종(祖宗)2이요
가야산(伽倻山)의 해인사(海印寺)3는 사찰(寺刹) 가운데 종가(宗家)라
산수 경치 사찰 구경 한 번 해보기를 원했으나
규문(閨門)4 안에 잠긴 몸이 벗어날 길이 없었더라
음양(陰陽) 시태(時態)5 변하고 유수광음(流水光陰)6 흘러가서
어느덧 노경(老境)7이라 백수풍상(白首風霜)8 흩날리니
많고 적은 자녀 모두 결혼시켜 음식과 방적(紡績) 전장(傳掌)9하니
청풍명월(淸風明月) 좋고 내 한 몸이 한가하다
옛사람을 본보자면 당나라의 향자평(向子平)10
남혼여가(男婚女嫁)11 마친 뒤에 천하 강산에서 놀았으니
남녀 분별 있을망정 사람의 일이 마찬가지라
<가야해인곡>은 작자 및 제작연대 미상의 규방가사 작품이다. 두루마리에 순국문 표기로 이 작품만이 필사되어 있으며, 원전의 크기는 465*27cm이다.
이 작품은 오랫동안 계획했던 성주(星州)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를 유람한 내용을 쓴 것이므로 기행가사로도 볼 수 있다. 규방에서 오랜 세월동안 내조하며 살았던 작자는 자식을 다 키워 출가시키고 한가해지자 친구들과 가야산 해인사로 유람을 떠난다. 가야산이 있는 성주읍에 이르러서는 시댁(媤宅) 세조(世祖)의 춘추제향(春秋祭享)을 언급하고 있고, 윤동(倫洞)에서는 친척들과 옛 친구를 만나 여러 날을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작자는 원래 성주 지역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 여섯으로 출발했던 여행 인원은 성주에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합세하여 열한 명으로 늘어나고 본격적인 유람이 시작된다. 작품 중반은 기행가사답게 가야산 홍류동(紅流洞)의 아름다운 경치에 대한 찬사가 주를 이루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야산에 은거했던 신라 문인 최치원의 자취를 더듬으며 인생무상의 소회를 풀어낸다. 작품의 후반부에서는 해인사에 도착한 뒤 그 곳에서 느낀 감흥을 서술하고 있다.
이색적인 점은 승녀(僧女)들을 바라보는 작자의 시선이다. 작자는 여승의 아름다운 용모를 안타까워하며, 결혼하여 아들딸을 기르기를 권유하고, 그것이 사람이 지켜야 하는 윤기(倫紀)라고 설파한다. 남편을 내조하면서 자식들을 잘 길러낸 규방 아녀자로서의 자부심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작품에 중국 고사와 문인(文人), 시문(詩文)들이 자주 인용되고 있는 것으로 미뤄 볼 때, 작자는 상당 수준의 소양(素養)을 갖추고 있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어휘 풀이
1)가야산(伽倻山) : 경상북도 성주군과 경상남도 합천군 경계에 있는 산. 높이 1430m. 소의 머리와 모습이 비슷하다고 하여 우두산(牛頭山)이라고 불림.
2)조종(祖宗) : ① 시조가 되는 조상. ②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3)해인사(海印寺)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가야산 중턱에 있는 절. 국보 32호인 팔만대장경을 소장하고 있음.